본문 바로가기
우리 이야기

무화과

by GaChon 2026. 8. 13.

무화과 열매의 껍질을 살짝 벗겨 한입 베어 물면, 달콤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웁니다. 

이름에는 '꽃이 없는 나무'라는 뜻이 담겨 있지만, 

사실 무화과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분명히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숨은 꽃'이라는 뜻에서 '은두화(隱頭花)'라고도 부르지요. 

 

진화상 이끼류인 선태식물과 고사리류인 양치식물보다 진화한 고등식물들은 

모두 번식을 위한 기관을 갖춥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화려한 꽃이 아닐 뿐, 소나무도 솔방울 형태의 꽃(구과)을 피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맛있게 먹는 무화과를 반으로 잘라보면 수많은 작은 알갱이들이 보이는데, 씹을 때 톡톡 터지는 이 알갱이들이 바로 무화과의 진짜 씨앗이자 꽃입니다. 

 

식물학자와 진화학자들에게 무화과는 놀라울 정도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식물입니다. 

야생의 무화과는 종족 번식을 위해 '무화과 말벌'과 기막힌 공생 관계를 맺습니다. 

암컷 무화과 말벌은 냄새를 맡고 수나무의 열매를 찾아가는데, 

밑동에 난 구멍이 너무 좁아 날개와 더듬이가 모두 부러져야만 겨우 안으로 기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수나무 열매 안에는 꽃가루를 만드는 수꽃과 함께 '기형적인 암꽃'이 들어있습니다. 

이 기형 암꽃은 말벌의 산란관 길이에 딱 맞아 오직 말벌의 '아기방' 역할만 하도록 변형된 곳입니다. 

암벌은 이곳에 알을 낳고, 몸에 묻혀온 꽃가루로 무화과를 수분시킨 뒤 생을 마감합니다. 

이때 무화과는 '피신'이라는 단백질 분해 효소를 분비하여 죽은 암벌을 분해해 흡수해 버립니다.

 

시간이 흘러 열매 속에서 수컷 말벌이 먼저 부화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날개가 없는 수컷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암컷들과 교미한 뒤, 

있는 힘을 다해 무화과 벽에 탈출용 구멍을 뚫고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구멍으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면 비로소 암컷들이 잠에서 깨어납니다. 

바로 이 타이밍에 맞춰 무화과는 수꽃의 화분을 터뜨려 암컷의 온몸에 꽃가루를 잔뜩 묻힙니다.

 

암컷들은 수컷이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가 다시 알을 낳을 수나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운 좋게 수나무를 찾으면 성공적으로 알을 낳아 유전자를 남기지만, 

만약 암나무 열매로 잘못 들어가면 알을 낳지 못합니다. 

암나무의 암꽃은 암술대가 너무 길어 말벌이 산란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암나무는 수나무와 똑같은 페로몬 향을 풍겨 암벌을 유인하고, 

속아서 들어온 암벌을 통해 자신들의 진짜 암꽃을 수분시킵니다. 

말벌에게는 안전한 산란 장소를 제공하면서도, 때로는 말벌을 철저히 속여 자신의 번식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를 식물과 곤충의 아름다운 공진화라고 해야 할지, 치열한 생존 경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장에서 사 먹는 무화과 열매 안에도 효소에 녹아내린 말벌 사체가 들어있는 걸까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앞서 예로 든 복잡한 공생 관계는 지중해 연안 등지에서 자라는 야생 무화과의 이야기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재배하고 있는 무화과는 인간이 오래도록 개량한 품종으로, 

모두 암꽃만 피우는 수종입니다. 

말벌이 수분을 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열매를 맺는 '단위결과(Parthenocarpy)'를 하기 때문에 

벌레가 들어갈 일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니 무화과를 먹을 때 톡톡 씹히는 것은 안심하고 즐기셔도 좋은 무화과의 건강한 씨앗입니다.

 

 

정정채 박사

'우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루오줌  (0) 2026.09.15
백당  (1) 2026.07.15
잠꾸러기 나무  (0) 2026.06.15
무등 때죽  (0) 2026.05.18
춘란 보춘화  (1) 2026.04.12